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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쌤의느린여행

강화 갈만한곳 나들길 2코스에 있는 덕진진 남장포대 광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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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30도를 웃도는 무더위가 계속되었던 8월 초,

한여름 햇살은 아침부터 뜨거워 조금만 걸어도 숨이 헉헉 차올랐다.

강화 나들길 2코스에 있는 초지진과 덕진진 등 문화유적지에는 차를 이용한 관광객이 잠깐 둘러보고 갈 뿐, 도보로 걷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강화 나들길 2코스는 한여름만 아니라면 역사기행 삼아 아이들과 와도 좋을 견학 장소가 될 것 같다. 우리 가족도 한때 마니산 참성단까지 올라갔던 때가 있었지.활쏘기 체험장에서 둘째가 정확하게 과녘의 중앙을 꿰뚫어 주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외세 침략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는 초지진을 둘러 보고 덕진진으로 왔다.

초지진에서 덕진진까지는 2.8km 거리라 차로 약 4분 거리이면 갈 수 있어 덕진진 다음 광성보까지 함께 둘러 보면 좋을 코스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왔는데 우리의 아픈 역사를 둘러 보는 역사기행같은 기분이다.

 

 

▼ 아래는 먼저 둘러 보았던 초지진 포스팅

2023.08.20 - [풍경쌤의느린여행] - 강화도 가볼만한곳 강화 초지진 소나무 포탄 흔적

 

강화도 가볼만한곳 강화 초지진 소나무 포탄 흔적

바다 일출을 보고 싶어 초지대교를 건너 강화도 초지진에 왔다. 지금은 강화대교 초지대교가 놓여 더 이상 섬이 아니지만, 서울에서 가깝고 강 폭이 넓은 지리적인 위치에 있는 강화도는 임금의

joys365.tistory.com

 

 

 

 

 

 

■ 강화 덕진진 

사적 제226호

조선시대에 강화해협을 지키던 요새. 1971년 12월 29일 사적으로 지정

 

강화 덕진진 공조루

 

 

주소 : 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46

개방시간 : 매일 09:00 - 18:00 동절기에는 17시까지

입장료 :  무료입장

주차요금 : 무료

 

 

 

 

 

덕진진은 조선시대 강화 해협을 지키는 요충지로 원래는 수영(조선시대 수군절도사가 있던 군영)에 속한 진이었다. 덕진돈, 남장포대 등이 모두 덕진진에 소속되어 있었다. 돈대(주변 관측이 용이하도록 평지보다 높은 평평한 땅에 설치한 소규모 군사 기지)와 포대는 조선 숙종 5년에 설치했다. 19세기 후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 외세에 맞서 싸운 장소이며, 신미양요 때 파괴되어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만 남아 있었으나 1977년 돈대와 성곽을 보수하고 덕진진의 성문인 공조루를 복원했다.

 

 

 

 

 

강화 덕진진의 성문 공조루

공조루는 덕진진의 성문으로 신미양요 때 파괴되어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만 남아 있었으나 1977년 돈대와 성곽을 보수하고 덕진진의 성문인 공조루를 복원했다.

 

 

강화 덕진진 공조루 홍예문

 

공조루 홍예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앞에 강화해협이 보인다. 

강화도가 왜 요새인지를 알 것 같았다.

 

 

 

공조루 홍예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성벽을 따라 오르는 길을 따라 가면 남장포대가 나온다. 

 

 

 

남포장대 가는 길에 쉴만한 공원도 있고, 등나무 그늘막 쉼터도 있다. 

 

 

 

이 길도 강화나들길 코스인가 보다.

 

 

 

공원 끝에 강화해협이 한 눈에 보이고, 멀리 초지대교도 보인다.

지금이야 강화대교 초지대교가 놓여서 섬이라고 할 수 없지만, 저 다리가 놓여있기 전에는 서울에서 가깝고 김포에서 배를 타고 들어와야만 하는 곳이라 임금의 피난처로도 중요한 곳이었다는 것이 실감난다.

덕진진 맞은편에는 김포 덕포진이 있다.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체험학습이 중요한 것 같다.

 

 

 

▲ 신미양요 때 미군이 강화로 침입했던 당시를 기록한 사진들

  1. 덕진돈대를 강제 집행한 미국군사들이 주변 지형을 살펴보고 있다.
  2. 덕진돈대를 강제집행한 후 성조기를 게양하는 모습
  3. 덕진진 앞쪽 해안가에 경비를 서고 있는 해군장교 1명과 수병 6명

 

 

 

강화 덕진진 남장포대

▲ 남장포대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에 있는 조선후기 에 축조된 포대. 군시설·돈대.

 

강화 9개 포대 중의 하나로, 1871년(숙종 5)에 축조되었으며 덕진진(德津鎭)의 관할하에 있었다.

자연적인 지리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해상에서는 적에게 보이지 않는 반월형의 천연요새를 이루어 마치 중국의 손자병법을 재현한 전략을 연상하게 한다. 포좌(砲座) 15문이 설치되었다가 파괴된 것을 1977년에 다시 복원하면서 조선시대 홍이포(紅夷砲)를 만들어 설치하였다.

 

 

 

홍이포가 설치되어있는 남포장대

자연적인 지리를 이용하여 해상에서 보면 반월형의 천연 요새를 이루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강화 덕진진 남장포대 홍이포

 

 

 

홍이포 

명나라 때 네덜란드의 대포를 모방하여 만든 중국식 대포

우리나라에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가 가져와 사용한 것이 처음이며, 인조 때 정식으로 들여오게 되었다. 네덜란드인으로 제주도에 표류한 벨테브레(박연), 히아베르츠, 피아테르츠 등이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조선군에게 홍이포의 제작법·조종법을 가르쳤다.

[네이버 지식백과] 홍이포 [紅夷砲]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돌아 나오는 길~

강화 시인 함민복 시인의 짧은 시가 푯대에 쓰여있다. 

 

그리움, 천만 결 물살에도

배 그림자 지워지지 않는다

 

 

 

사적 제227호 강화 광성보

 

주소 : 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33

1871년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이다. 그 해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오는 미국 극동함대를 초지진·덕진진·덕포진 등의 포대에서 일제사격을 가하여 물리쳤다. 그러나 4월 23일 미국 해병대가 초지진에 상륙하고, 24일에는 덕진진을 점령한 뒤, 여세를 몰아 광성보로 쳐들어왔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로 분전하다가 포로 되기를 거부, 몇 명의 중상자를 제외하고 전원이 순국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강화 광성보 [Gwangseongbo Fort, Ganghwa, 江華 廣城堡]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우리 역사는 참 슬프다.

비참하고 처절하다.

물론 지금도 국가간의 힘겨루기가 팽팽하긴 하지만 그때는 왜 그리 피를 보는 싸움이 끊이지 않았는지......

생태계에서나 있을법한 약육강식이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도 끊이지 않는다.

친구간에 서로 사이좋게 지내라고 하면서,

이웃간에 서로 사랑하라고 하면서,

글로벌시대 나라와 나라는 이웃처럼 가까워졌고, 친구처럼 서로 왕래하면서 행동은 치열하게 싸움을 걸고 아웅다웅하는 현실이 웃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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